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고지전 == || [[파일:고지전1.jpg|width=100%]] || || 고지전이 펼쳐진 주요 격전지[* 군사분계선의 모양이 정확하지 않으며, 특히 서부전선과 그 일대의 [[공동경비구역|판문점]], [[문산읍(파주)|문산]]의 위치가 실제보다 서북쪽에 있다.] || 중공군의 서울 재점령 실패 및, 전선 고착화가 이루어지자. 6.25 전쟁은 전격전에서 국지전 양상으로 변화한다. 양측은 서로에 대해 전면 공세를 포기하고, 전선 주변의 전술적 요지를 두고 벌이는 [[고지전]]으로 전환된다. 6.25 전쟁의 66%에 해당하는 2년이 넘어가는 기간동안 엄청난 규모의 [[소모전]]이 펼쳐지지만 중공군의 1951년 5월 공세 반격 완료 직후인 [[1951년]]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1951년 10월 UN군이 실시한 추계 공세로 전 방면에서 전선이 대략 10km 정도 북상한 것과 휴전 직전에 벌어진 [[금성 전투]]로 금성 돌출부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이때 형성된 전선의 모양이 휴전시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측 모두 더 이상 상대 진영으로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봤자 '''소모되는 인력과 자원에 비해 이득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개전 초기 북한군만 상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하다고 보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벌어졌지만, 대규모 병력이 투입된 중국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기엔 부담이 심하다고 여겼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이 종전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전면전을 벌이기엔 아무리 미국이라도 부담이 컸으며, 미국 내 여론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개전 초기의 호의적 여론이 돌아서서 전쟁을 끝내야 된다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무엇보다 '북한 지역'을 점령해야할 당위성이 떨어졌다.[* 대한민국은 헌법으로나 국민 여론이나 북한 땅을 '미수복영토'로 보지만, 제3자인 미국 여론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하게 재현되어 남베트남의 공세를 미군이 미온적으로 도울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다.] 한편 중국군은 보급 문제와 항공 전력의 미비로 남하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중국 역시 '북한'을 도와주러 온 것이지 중국 인민의 피를 흘려가며 북한을 위해 '남한 땅'을 점령해주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이 당시 열강들의 1차 목적은 어쨌거나 한반도가 완전히 자본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이든 남한이든 존속만 하면 되었지 더 넓은 영토를 가지는 것은 큰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남북한 모두 당사자 입장에서는 멸공/적화 통일을 원했겠지만 UN과 중국은 생각이 달랐다. 특히 한반도의 기후는 참전 군인들의 염전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이 당시 UN군 참전수기를 보면 한반도의 극악한 기후에 대한 언급이 꼭 나오며, 수뇌부 입장에서도 비전투 손실인력이 많아지는 것은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괜히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 등 한반도의 맹추위를 겪고 나서 양측 수뇌부가 휴전 협정에 들어간게 아니다. 결국 상기한 이유들로 양측 모두 더이상의 전면전은 원하지 않았으며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중공군은 최대한 저비용 고효율을 내기 위해 공세에서 수세로 변경,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전선에 [[만리장성]] 길이에 버금가는 규모의 지하 갱도진지를 건설했고, 이를 분석한 UN군은 '이거 핵무기 없이는 못 뚫겠는데?' 라는 판정을 내렸다. 아무리 폭격을 퍼부어도 한반도의 산악지대 기반으로 건설된 진지에 숨은 중공군을 괴멸시키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돌파하려면 대량의 보병 사상자를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속 북진하다가는 소련이 참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한반도에서 벌이는 전쟁이 과연 소련과의 전면전을 감수해도 괜찮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미국 내에서 제기되면서 결국 현 전선을 유지하고 휴전을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이에 따라 1951년 6월부터 본격적인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정작 전쟁의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정확히는 [[이승만]]과 [[김일성]]) 모두 휴전제안에 불복했고, 각자 지원세력의 결단때문에 휴전 자체를 막을 수 없다면, 현 전선을 그대로 휴전선으로 할 것인지, 위도에 따른 전선으로 할 것인지, 개전 이전으로 할 것인지 어느것도 결론이 나지 않은 지리한 상태에서 단 1㎢라도 더 넓은 땅을 먹기 위해 최대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 지물을 손에 넣기 위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파일:51년 동부전선(양구).png|width=100%]] || || 1951년 동부전선 양구지역 주요전투 ||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UN군이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 때문에 개성시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정하자, 한국으로서는 최소한 동부전선에서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이를 만회할 입장이었다. 이로인해 1951년 여름~ 겨울 사이 국군과 미군은 동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가해 [[도솔산 전투]]를 시작으로, [[펀치볼 전투]], [[피의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승리하여 양구, 고성 일대의 전선을 북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물론 연합군의 공세를 받아내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군 12, 13사단에 비하면 적긴 했지만 목적을 달성한 대가로 국군과 미군 또한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기에, 1951년 겨울 전후로 쌍방 양측은 1953년 초까지 군단급의 대규모 공세대신 전선 근방의 허점을 노린 집요한 쌍방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중공군 개입 이후 북한군은 일부 전선을 제외하면 최전선에서 거의 빠지게 되고, 전투는 대부분 중공군이 담당했다. 북한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린데다 부족한 인구수로 전시생산하기에도 바빴기 때문이다. 한편 남한은 북한의 2배가 넘는 인구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개전 초기의 피해를 복구하고 60만에 달하는 징집병을 뽑아내어 전선의 대부분을 담당하면서 전쟁 중후반부터는 대결 양상이 국군과 중공군의 대결 위주로 넘어갔다. 그리고 미국의 체계적인 전술훈련이 성과를 내기 시작한 1952년부터는 국군이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크게 성장하여 전쟁 후반 대표적인 격전인 '''[[백마고지 전투]]''', [[금성 전투]] 등에서 선전했다. 물론 중국군이 병력을 100만 이상으로 늘리면서 초기 고참병들 위주의 정예가 아니게 되어 질적 수준이 떨어진 점은 있지만 국군이라고 병력을 급격히 늘리는 상황에서 사정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군 조직 자체가 발전하면서 중국군을 상대로 선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